신도~일본 인간 정신의 기원과 근대에 그 의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신사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신사를 처음 참배하는 것, 신사를 참배하는 것, 753 신사를 참배하는 것, 악을 쫓아내는 것,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것, 교통 안전을 기원하는 것 등 인생의 고비가 될 때 다양한 기도를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습관입니다. 최근에는 파워 스폿으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신사를 방문하는 사람도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사에 모셔져 있는 신들의 가르침, 즉 신도의 본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신도(神道)가 가까이 있다
신토는 일본 국민의 조상인 조상을 기리고, 감사하고, 모시는 신앙입니다. 동시에 선조의 힘, 즉 하나님의 힘을 사용하여 국가를 다스리고 일본 국민의 행운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신도는 일본 사람들의 정신, 가치관, 행동 양식의 기초이며, 풍부한 지혜를 접함으로써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욕망과 "순수한 마음": 두 마음의 갈등
신도(神道)에서는 우리 마음에 다양한 걱정과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이라는 마음과 신(일본의 조상)이 준 또 다른 '맨마음=신의 의지'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순수한 마음"은 순수한 마음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뜻에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일본 국민은 고대부터 이 '날것의 마음'을 바탕으로 다양한 욕망(식욕, 돈에 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 오만감, 과도한 성욕 등)을 억제하고 쫓아내면서 국가를 건설해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알고 있었다. "두려워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오래 전에 지나갔다"는 속담처럼, 마음의 혼란은 개인의 파멸뿐만 아니라 국가의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근대 일본은 다양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본 국가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먼 신들의 조상들의 결과로 건설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에서 욕망을 몰아내는 것이 영원한 과제입니다.
국가 건설과 노동에 대한 관점, 그리고 노동을 신성한 의식으로 보는 관점
우리의 먼 조상인 신들이 일본을 창조한 것처럼, 우리도 '더 나은 일본을 만든다'는 높은 포부를 가지고 노력함으로써 선조들의 생활 방식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더 나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신도로 이끄는 길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일본 사람들의 직업 윤리의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과거 일본 사람들은 일하는 것이 단순히 생계를 꾸리는 수단이 아니라 신성한 의식, 이 세상에서 자신을 단련하는 관행 또는 거친 관행이라는 의식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전후의 잿더미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경제 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더 나은 일본 만들기'라는 강한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포만감의 시대에 접어든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교만해지고, 자신의 본질을 못하며,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하다"는 '돈과 지위와 명예를 원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자신보다 부유한 사람에게 복종하거나, 반대로 가난한 사람이나 직업 때문에 경멸한다. 이처럼 '돈이 있든 없느냐'라는 척도는 오늘날 일본의 가치관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양한 욕망의 갈등 속에서 고통 받는다 。
그런 상황에서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일본 국민의 진정한 마음 =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일본의 "날것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의 발현
우리는 본래 먼 조상인 신들과 같은 "맨마음 = 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일본 국민의 '진심'은 다양한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지진과 같은 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고 약탈이나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데, 이것이 진정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타인을 배려하고 서로 도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도 '진심'의 표현입니다. 이 행동은 다름 아닌 일본이라는 나라를 창조한 신(조상)의 의지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일지 모르지만, 그 근본에는 하나님의 뜻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맨마음 =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 규율과 윤리가 형성되고 사람들이 질서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않을 때에도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친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 깨끗하고 깨끗한 아름다운 거리 등 일상생활에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의 근저에 있는 '맨마음 =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일생 동안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닐까요?
죄와 더러움과 정욕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축하 노래인 "엑소시즘"에는 "죄의 더러움을 쫓아내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죄 많은 더러움"은 과도한 욕망(식욕, 성적 욕망 등)을 의미합니다. 신의 고귀한 의지, 즉 그 뒤에 숨어 있는 '날것의 마음'을 욕정으로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고대 신도의 가르침입니다. "청결한 마음=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일본의 신과 선조들은 "맨마음 = 신의 뜻"을 바탕으로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는 욕망에 이끌리지 않았다. '엑소시즘'의 행위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도 조상과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신도의 뿌리에 자리 잡고 있는 신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맨마음=하나님의 뜻'이라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창조하려고 노력하는 행동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뜻과 유전된 DNA
일본 전역에는 81,336개의 신사가 있으며(문화청에 따르면), 고지키, 일본 쇼키, 호쓰마 츠타에와 같은 고대 문헌에 묘사된 신의 마음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들이 피로 연결된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의 후손으로서 그 DNA를 물려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유업으로 물려받아 태어났습니다. 신은 감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영성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욕망에 지배되어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진정한 의도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
진정한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맨마음 =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벌거벗은 마음"은 자신의 욕망을 쫓아내는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가르쳐지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욕망의 더러움을 몰아내고 '참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맨마음 =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번뇌를 없애는 방법: 적게 먹는 것과 깨달음
그리고 더러움을 줄이기 위해서는 몸을 오염시키지 않는 식단, 즉 폭식과 폭식을 바꾸고 소량의 식사를 실천해야합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이 욕구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식욕이 강할수록 욕망과 걱정은 더 많아지고 괴로움은 더 깊어진다.
반면에, 음식을 금하는 것이 일상이 될 때, 우리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우리의 마음은 자유로워진다.
이런 식으로 먹는 것을 계속 삼가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맨마음=하나님의 뜻'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이런 다이어트를 계속하다 보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욕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면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신도는 우리 내면의 신성을 일깨우는 방법이며,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그분의 뜻을 구현하며 살아갑니다. 이 점을 인식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